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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얼빈 의거 115주년 기념 특별전 '안중근 서(書)' 전시 소개

 

1.첫번째 이야기 "가문"

1910년 3월 안중근 의사는 세상을 떠났지만 독립에 대한 의지는 가족에게 이어졌습니다. ‘소년 안응칠’이 ‘의사 안중근’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안중근 의사뿐만 아니라 많은 독립운동가를 길러낸 가풍 덕분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황금백만냥 불여일교자
黃金百萬兩 不如一敎子
“황금이 백만 냥이라도 자식에게 하나를 가르침만 못하다”

2.두번째 이야기 "신앙"

천주교에 대한 신앙심은 안중근 의사의 일생에서 중요한 가치 중 하나였습니다. 도마(Thomas)라는 세례명도 받았는데, 안중근 의사는 천주교인이 된 이후 일생을 도마 안중근으로 살았습니다.

천당지복 영원지락
天堂之福 永遠之樂
천당의 복은 영원한 즐거움이다

 

3.세번째 이야기 "애국"

1905년 러일전쟁과 을사늑약으로 국권이 강탈되는 모습을 보며 안중근 의사는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르 각 신부를 만나 실력양성운동의 중요성을 깨닫고 국내로 돌아와 애국계몽운동가로 성장하였습니다.

국가안위 노심초사
國家安危 勞心焦思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고 애태운다.

4.네번째 이야기 "의병"

1907년 정미7조약이 체결되어 군대가 해산되고 고종이 폐위되자 안중근 의사는 연해주로 향했습니다. 연해주에서 안중근 의사는 의병으로 변모하였습니다. 흩어져 있던 연해주 지역 한인들의 민심을 모으고 훈련하여 국내진공작전을 펼쳤습니다.

위국헌신 군인본분
爲國獻身 軍人本分
나라 위해 몸 바침은 군인의 본분이다.

5.다섯 번째 이야기 "동지"

국내진공작전에 실패한 이후 안중근 의사는 뜻을 같이할 동지들을 모았습니다. 안중근 의사 자신을 포함한 12명의 동지를 모아 단지동맹을 결성했습니다.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북만주를 시찰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와 뜻을 모아 의거를 결심하고 하얼빈으로 향했습니다
 

장부수사심여철 의사림위기사운
丈夫雖死心如鐵 義士臨危氣似雲
장부는 비록 죽을지라도 그 마음 쇠와 같고,
의사는 위태로움에 이를지라도 그 기풍 구름 같도다.

6.여섯 번째 이야기 "동양"

1909년 10월 26일 아침, 하얼빈 역. 안중근 의사는 국권을 강탈하고 동양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본 제국주의를 향해 총구를 겨누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동양을 보호한다며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한 일본 제국주의를 비판하고, 동양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의거를 결행하였습니다.

동양대세사묘현 유지남아기안면
화국미성유강개 정략불개진가련
東洋大勢思杳玄 有志男兒豈安眠
和局未成猶慷慨 政略不改眞可憐
동양대세 생각하매 아득하고 어두우니 뜻있는 사나이가 편한 잠을 어이 자리.
평화시국 못 이룸이 이리도 분개한지고. 정략을 고치지 않으니 참으로 가엾도다.

7.일곱 번째 이야기 "평화"

하얼빈 의거 직후 일본은 러시아령 하얼빈에서 자신들의 관할구역인 뤼순으로 재판정을 옮겼습니다. 그럼에도 안중근 의사는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를 외치며 치열하게 법정에서의 싸움을 이어갔습니다. ‘대한국인 안중근’은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위해 글(書)로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섰습니다.

지사인인 살신성인
志士仁人 殺身成仁
지사와 어진 사람은 자신을 희생하여 인을 이룬다.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15주년 기념 특별전  바로가기

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115주년 기념 특별전 <안중근 書>

박물관이용, 전시, 교육, 행사, 학술연구, 소장자료, 알림, 참여, 박물관 소개 자료 제공

www.much.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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